'신의'가 전설적인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사랑을 그려내며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이들의 비극적인 사랑은 실제로 어땠을까.
고려 말기 비운의 개혁군주 공민왕과 원나라 위왕의 딸 보탑실리의 비극적 사랑이 약 660여년을 거슬러 SBS 월화드라마 '신의'(극본 송지나/연출 김종학 신용휘) 속으로 녹아 들었다. 물론 극적 상상력을 더해 만든 허구의 이야기이나 그들이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점만은 사실로 보인다.

공민왕(당시 강릉대군)은 그녀를 고려 여인으로 오인하고 "고려 여인인가. 복장이 이래서 원의 귀족여인인줄 알았다. 혹시 이번 조공행렬에 끌려왔냐. 나도 고려왕실의 한 사람이다. 위에 앉아 있는 자들이 부실해 아래 백성들이 고초를 겪고 있구나. 돌아가고 싶으냐. 우리 땅, 고려로 돌아가고 싶으냔 말이다. 가자"고 말했다.
또 보탑실리에게 "날더러 원의 여인과 혼인하라 한다. 12살 어린 나를 여기까지 인질로 끌고와 저기 황태자에게 시중 들라며 수모 주더니 이젠 그들의 사위가 되라 하는구나"라고 털어놓았다.
보탑실리가 "싫으냐"고 묻자 공민왕은 "저들 맘대로 고려의 왕을 임명하고 폐위시키고 선왕인 내 형님께선 왕위를 뺏기시고 귀양을 갔다. 나 또한 그들의 사위가 되고 고개를 숙이고 얻어 맞고.."라며 분노를 토했다.
이에 보탑실리는 "그래도 상대가 공주라하니 도움되지 않겠습니까"라는 대답으로 첫 눈에 반했음을 시사했다. 결국 보탑실리는 공민왕에게 자신의 정체를 발설하지 못했다.
공민왕은 보탑실리에게 "아무래도 원의 공주와의 혼인은 나 혼자 힘으로 피하기 힘들 거 같소. 허나 고려인인 그대가 나의 첫번째 부인이 되어주오. 지금처럼 이렇게 내가 하소연하면 들어주고, 두려워 떨고 있으면 옆에서 잡아주오. 원의 계집 따위는 그대 옆에 접근도 못하게 할것이야"라고 가슴 아픈 청혼을 한다.
하지만 2년후 1351년 개경으로 건너온 이들은 서로 냉랭한 사이를 유지한다. 보탑실리는 공민왕을 애절한 눈빛으로 쳐다보나 곧 속내를 감추고 공민왕 역시 일정 거리를 만들어 원수국의 공주를 대한다.
실제로 노국공주는 원나라 종실 위왕 딸로 1351년, '신의'에서 첫 등장할 시점에 공민왕과 원나라에서 결혼한다. 그해 12월 개경으로 돌아온 노국공주는 결혼한 지 8년이 되도록 아이가 없었다. 하지만 정략결혼에 의해 맺어진 이들은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후대에 알려져 있다.
공민왕 이전의 왕들이 시집 온 원나라 공주들에 대해 주색잡기로 일관하며 좋지 않은 부부 사이로 지낸 반면 공민왕은 달랐던 것.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는 1361년 홍건적 침입에 개경까지 함락당하는 고난을 함께 겪으며 정치적 파트너로, 또 진정한 부부로 금슬 좋은 사이였다.
어렵사리 임신한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인해 사망하자 '고려사절요'는 말할 것도 없고 안정복 '동사강목'에도 공민왕에 대해 "노국공주가 훙서하매 마음이 더욱 기울어져 희노애락이 중용을 잃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세종 실록에도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를 대하듯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의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이익 '성호사설' 제 11권에도 "공민왕이 공주를 추모하여 손수 그 영정을 그려 놓고 밤낮으로 슬피 울며 3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고, 무릇 공주를 위한 일이라면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는 내용이 담겨 수록돼 있다.
고려시대 왕들은 왕비와 따로 매장해 왔다. 하지만 노국공주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 공민왕 역시 사후 정릉 옆 현릉에 매장됐다. 이 같은 사례는 처음이다. 안동에는 지금도 노국공주와 관련해 '놋다리 밟기' 등 풍습이 전해지고 있다.
역사적인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을 모티브로 따온 '신의'가 이들의 사랑을 앞으로 어떤 식으로 표현할지에 시청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사진=SBS '신의' 캡처)
김미겸 miky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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